논어에는 군군신신부부자자[君君臣臣父父子子]라는 글이 있다. 풀이하자면, 공자의 정사[政事]에 관한 물음에 대한 답변이다. “임금은 임금 노릇 하며, 신하는 신하 노릇 하며, 아버지는 아버지 노릇 하며, 자식은 자식 노릇 하는 것입니다.”라는 답이다.
이름 하여 위상에 맞는 ‘노릇’이라고 할 수 있고, 한편으로는 ‘답다‘나 ’다움‘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. 노릇은, 사람으로서 역할과 구실은 물론, 일의 됨됨이나 형편까지도 일컫는 자격·직업·직책을 나타내기도 한다. 단계를 깊이하자면, ’~답다[다움]‘라고도 할 수 있을 터인데, 그것이 지니는 성질이나 특성을 나타내기도 하는 풀이로도 해석할 수 있다.
때문에 상상을 보태자면, ‘정정당당’은 ‘정치[인]는 정치[인]다워야 하고, [정]당은 [정]당다워야 한다’라고 표현하면 너무 나간 어불성설일까. 아무리 말로 하는 정치[인]이라고 하지만, 요즘 정치[인]들의 행태는 목불인견[目不忍見]으로 끔찍하기 이를 데 없다고 외면하는 국민들의 원성이 높은 게 현실이다. 정치[인]에 대한 능동적 외면이고 불신이다.
속살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, 정치인들 말의 저속화[低俗化]가 심각하다. 공직으로서의 품격이 곧 언어라면, 외면을 넘어 혐오와 비호감을 유발한다. 공인[公人]‘다움’이 전혀 없고, 오히려 공인으로서의 특권을 남용하고 오용[誤用/惡用]하고 있어 저주[咀呪]가 절로 나온다. 본분을 망각한 저주의 정치판이고 상극의 이전투구가 그 한계를 가늠하기 어렵다.
국가의 격이 그 나라 정치[인]의 격이라면, 지금 국가의 국민으로서 불행하다. 물론 국민의 선택이었다지만, 선출되기 전에야 어찌 그 깊은 심중을 헤아릴 수 있었겠는가. 후회는 반성과 희생이 따른다. 그 시간만큼의 퇴보와 비용이 막대하고, 상처도 깊어질 수밖에 없음을 지금 목도[目睹]하고 있지 않은가.
[정]당이 [정]당다워야 하는 이유와 본질이다. 아무리 정당의 목적이 정권 탈취[?]에 있다고 하지만 이 건 아니지 싶다. 당에 모인 정치인들이 그 ‘답지’ 않다면, 정당은 더욱 그 답지 못한 것이야 명약관화[明若觀火]할 터이니 말이다. 나라의 주인인 국민이 외면·무시한 정치와 정당은 무용하고 허황, 그 자체일 수밖에 없음을 그들은 과연 모를까.
곧음이 불요한 세상은 분명 불행이다. 굽은 나무가 천수를 다하는 [此木以不材 得終其天年, -莊子 山木篇] 시국이라면, 또한 한없이 불행[不幸]하지 않은가. 정치[인]도 정치[인]답지 못하고, [정]당도 [정]당답지 못하다면, 그 대책이나 대안은 국민이 국민다워야 하는 것이 불상[不祥]하지만 마지막 해법이다. 이른 바 올바른 선택을 위한 지민[知民]이어야 하는 책임과 능력의 함양 말이다. 끝 모르는 불행과 불편의 종식[終熄]은 유권자의 책무일 터이니 말이다.
이제 차가운 시절이 다가오고 있음을 절감한다. 국민의 궁핍을 정·당으로는 기대할 수 없는 거대 한파가 눈앞에 선명하다. 이제 국가를 걱정하기보다 각자도생[各自圖生]을 모색해야하는 국민은 스스로의 자탄[自歎]을 딛고, 지금을 발판으로 민민[憫憫]을 벗 삼고, 민민[民民]의 계기로 정정당당[正正堂堂]해야 하는 지상 과제임을 깊이 성찰해야 할 절박한 시점이다. <저작권자 ⓒ 경기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>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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